도요타의 캠리.
도요타의 캠리.

2010년, 미국 중형 세단 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현대자동차 YF 쏘나타의 등장 때문이었다. 1988년 미국에 처음 상륙한 쏘나타는 항상 아시아 변방의 ‘적당한’ 제품으로 인식됐다. 저렴한 가격, 많은 편의사양, 넉넉한 보증기간이 경쟁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YF 쏘나타는 달랐다. 출시하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대의 어떤 차보다 파격적인 디자인이 일등공신이었다. 눈길을 끌자 넓은 공간, 탄탄한 품질 같은 다른 장점도 함께 부각됐다. YF의 성공은 판매량이 입증했다. 12만~14만여대가 전부였던 쏘나타 판매량은 YF 출시 이후 단숨에 19만대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 2011년에는 처음으로 연간 판매량 20만대를 돌파했고 이듬해엔 23만여 대로 거듭 최고치를 찍었다.

경쟁사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했다. 시장 부동의 강자였던 도요타 캠리와 혼다 어코드가 대표적이었다. 캠리는 2011년, 어코드는 2012년에 모델 변경을 단행했다. 하지만 YF 쏘나타를 의식해 바꿔 입은 옷은 모양새가 어설펐다. 캠리는 튀어 보이고 싶어 안달 난 ‘관종’ 같았고, 어코드는 혼다답지 않게 점잖았다. 시기적으로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도요타는 2009년 즈음 터진 급발진 추정 사고와 연이은 대규모 리콜 사태로 휘청거렸다. 2011년엔 동일본대지진이 일본 자동차 제조사의 숨통을 조였다. 내우외환은 연구·개발의 제약으로, 나아가 시판 차의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일본 중형 세단의 반격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8세대 캠리가 시작이었다. 도요타는 일본의 확대된 중형세단 크기 기준을 토대로 차체 설계를 대거 손질했다. 기존 2775㎜였던 휠베이스가 2825㎜로 늘었는데, 이를 실내공간 확대 대신 주행성능 강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무색무취의 대명사였던 캠리는 이제 안정감 높고 움직임이 견고한 중형 세단으로 거듭났다.

혼다 어코드.
혼다 어코드.

지난 5월 국내 출시한 10세대 혼다 어코드는 더욱 인상적이다. 차체 설계의 대원칙은 도요타와 비슷했다. 휠베이스가 2775㎜에서 2830㎜로 커졌고, 이를 주행성능 강화의 발판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효과와 ‘달리는 맛’의 차이는 현격하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고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감이 넘친다. 움직임의 정밀함도 동급의 중형 세단들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반적인 주행성능이 유럽 스포츠세단에 뒤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견고하고 정교한 차체는 반응이 빠른 다운사이징 터보 파워트레인과 어우러져 한층 빛난다. 특히 새로운 10단 자동기어와 짝을 이룬 2.0ℓ 4기통 터보 엔진(256마력, 37.7㎏·m)은 화수분처럼 나오는 힘과 신속한 반응이 매력적이다. 소리의 설계도 빼놓을 수 없다. 날카로운 소리는 억누르고 그윽한 소리는 잘 추슬러 운전하는 기분을 한껏 북돋운다.

물론 완벽한 차는 아니다. TFT 디지털 계기판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복잡한 유저 인터페이스,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기능의 배치 등은 수년간 몰더라도 적응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앞쪽 문턱은 우레탄 소재지만 뒷자리 문턱은 우레탄 모양 플라스틱인 것처럼 생산 원가를 아끼려 한 ‘꼼수’도 적지 않다. 실내 디자인, 내장재나 조립품질 수준은 아무리 잘 봐줘도 한 세대 전 현대차그룹 경쟁모델 수준에 머문다. 안전장비, 편의사양의 수준도 비슷한 값의 국산 준대형 세단에 비할 게 못 된다.


일본 중형 세단, 현대차 그랜저와 경쟁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강하게 끌린다는 점이고 그건 혼다 어코드라는 자동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쏘나타는 LF로 세대 변경하면서 8년 전 YF로 터뜨린 파격의 기운을 스스로 내려놨다. 현대차가 멈칫하는 사이 일본 중형 세단은 다시금 자신만의 색깔을 회복했고, 그 기세는 생각보다 훨씬 드세다. 하반기에는 수입 중형세단 최초로 3000만원대의 벽을 허문 ‘가성비 모델’ 닛산 알티마가 6세대 모델로 일신해 돌아온다. 과감한 얼굴과 더불어 가변 압축비 터보(VC-T) 엔진과 같은 혁신 기술이 어떤 ‘맛’으로 연출됐을지 기대된다.

혼다 어코드의 하이브리드 스위치(왼쪽)와 하이브리드 모터 시스템.
혼다 어코드의 하이브리드 스위치(왼쪽)와 하이브리드 모터 시스템.

판에 박힌 패밀리 세단의 미로에서 탈출한 신세대 일본 중형 세단의 등장은 국내 중형 및 준대형 세단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터다. 현대차의 그랜저 IG는 어코드, 캠리와 가격대가 정확히 겹치지만 고급스러운 안팎 치장,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을 비롯한 최신 기능의 탑재로 여전한 경쟁력을 뽐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미국 중형 세단 시장에서 해당 라이벌들과 직접 충돌해야 하는 현대차 쏘나타 뉴 라이즈다. 쏘나타는 최근 미국 성적이 시원찮다. 연간 판매 20만대의 벽은 지난 2016년 이미 무너졌고, 지난해 판매량은 13만여대까지 뚝 떨어졌다. 그게 스스로 평범해지기로 한 선택의 결과는 아닌지 찬찬히 곱씹어볼 일이다.

김형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모터트렌드 코리아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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