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평 호세이(法政)대 경제학과, 고려대 경제학 석사 수료
이지평 호세이(法政)대 경제학과, 고려대 경제학 석사 수료

어느 순간 전 세계 가정에서 일본 브랜드 전자제품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한국 브랜드가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브랜드를 보유한 일본 회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 업체들은 실적 부진 속에 구조조정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기업과 경쟁하지 않는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으로 앞서나가고 있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만난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아베 정부의 정책 효과만으로 일본 경제가 지금처럼 회복된 것은 아니다”라며 “일본 기업은 20년간 구조조정해 과거와 다른, 아시아 기업과 경쟁하지 않는 특화된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로 변모했다”라고 말했다.


많은 일본 기업의 최근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아베 정부는 엔고(円高)를 엔저(円低)로 유도했고, 전력 부족 문제도 해결했고, 노동 유연성 제고 등 규제완화로 ‘6중고’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그런데 일본이 아베 정부의 정책 덕분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일본 기업은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동안 고생하면서 구조조정했다. 실적이 개선된 소니는 과거와 달리 반도체와 이미지센서, 콘텐츠로 돈을 번다. 파나소닉도 전자제품이 아닌 차량 부품이나 B2B(기업간 거래)로, 히타치도 발전설비나 교통 시스템 등 정부를 상대로 하는 B2G(기업·정부간 거래) 사업으로 수익을 올린다. 미쓰비시전기는 공장자동화에 강점이 있다. 아시아 기업과 경쟁하지 않는, 일본만이 할 수 있는 분야로 특화해 구조조정했다. 이 단계가 끝나 지금 성과가 나오는 것이다.”

모델이 조조타운이 제작한 ‘조조슈트’를 입고 있다. 사진 조조타운
모델이 조조타운이 제작한 ‘조조슈트’를 입고 있다. 사진 조조타운

제4차 산업혁명을 맞아 일본의 기술력이 돋보이고 있다. 일본 기업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을 융합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일본은 현실 공간에 많은 제조업체가 있고 현장에 쌓인 노하우가 많아 이걸 디지털 공간에서 활용하려고 한다. 일본은 1억명의 내수시장이 있고 첨단 기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일본 최대 패션 전자상거래 사이트 ‘조조타운’을 운영하는 ‘스타트투데이’는 ‘조조슈트(ZOZOSUIT)’를 고객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고객이 조조슈트 상·하의를 입고 스마트폰에 연결하면, 슈트에 부착된 센서가 인체 모든 부위 치수를 측정해 몸에 딱 맞는 옷을 주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재 일본 경제에 대해 진단해달라.
“아베 총리 취임 이후 양적완화 정책을 펼쳐 엔저(円低)를 만들었고, 주식시장에 붐을 일으켰다. 수출 대기업의 실적이 개선되고 고용 시장이 좋아졌다. 현재 대학생 98%가 졸업 전 취업이 확정될 정도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이 디플레이션(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시대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규모 양적완화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는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또 미·중 간 통상 마찰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게 과제다.”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일본은행이 목표로 하는 물가상승률 2%는 달성하지 못했다.
“‘GDP갭률’이란 지표를 보면 경기를 판단할 수 있다. GDP갭률은 2012년 -1.2%에서 2016년 -0.3%로 높아진 후, 2017년 2분기 0.4%를 기록하며 플러스로 전환됐고, 3분기에는 0.7%까지 높아졌다. 아베노믹스가 지속되면서 누적된 효과 덕분이다. 이제 물가상승 압력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2013년 4월부터 물가상승률 2% 목표 달성을 내걸고 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아베노믹스가 성과를 내고 일본 경제 회복에 기여했지만, 물가상승률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이 5년째 계속되고 있어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역시 양적완화 정책을 사용한 미국과 유럽은 돈줄을 죄는 쪽으로 정책을 틀고 있다.

언제 물가상승률 2% 목표를 달성하고 출구전략이 시작될까
“사실 선진국 가운데 물가상승률이 2% 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앞으로 2~3년간 일본에서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로 올라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면 그동안 출구전략을 전혀 하지 않을까? 사실 금융시장에선 ‘보이지 않는 출구전략’을 어느 정도 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일본은행은 연간 본원통화를 80조엔씩 증가시킨다는 양적완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지난해 이보다 적은 금액이 늘었다. 경기가 좋고 물가도 어느 정도 회복했기 때문에, 양적완화 규모를 신축적으로 조정하고, 경기가 나빠지면 다시 확대하는 흐름을 보일 것이다.”

일본의 현재 경제 회복은 전 세계 호황에 기댄 측면이 있다. 세계 경제 호황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일본 경제에 미칠 영향은.
“세계 경제 호황은 올해 상반기가 정점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성장률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겠지만, 하반기엔 성장세가 둔화되고 내년엔 올해보다 성장률이 조금 더 떨어질 것이다. 2020년엔 세계 경제가 둔화될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내년 경제 성장률은 0%대 후반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2020년 여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 2019년까진 건설 수요가 있겠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엔 경기가 둔화될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올림픽을 개최한 다음 해엔 경기가 둔화된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출구전략이 성공하면 일본 경제가 더 탄탄해질 것이다.”

일본은 사실상 완전고용상태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감소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다른 측면은.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이후 취업자수가 늘었다. 생산가능인구가 매년 감소하는데도 취업자수가 증가한 것은 정부가 굉장한 노력을 했다는 뜻이다. 여성의 취업률이 상승했고, 또 고령자 취업률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녀 양육기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하락하는 ‘M자 커브’ 현상이 해마다 완화되고 있다. 다만 여성과 고령자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많아 평균 임금이 올라가기는 어렵다. 물가가 회복했기 때문에 실질임금은 감소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아베 정부는 생산성을 높여 고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향의 정책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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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갭률
잠재GDP와 실질GDP의 차이를 백분율로 나타낸 것이다. GDP갭률이 플러스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마이너스면 디플레이션 압력이 있다는 뜻이다. ‘(실질GDP-잠재GDP)/잠재GDPx100=GDP갭률’이다. 실질GDP는 가격이 변함이 없다는 가정하에 국내에서 일정기간 내 생산된 생산물의 가치를 측정한 값이다. 잠재GDP는 한 나라의 경제가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노동과 자본 등의 생산요소를 완전히 고용하여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생산능력을 말한다.

손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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