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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규 대표가 라핀카에서 커피나무 화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이용성 차장

‘드넓은 초원에 우뚝 솟은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배경으로 커피 열매가 빨갛게 익어간다. 어디선가 나타난 기린 한 마리가 긴 목을 곧추세우고 주위를 살핀다.’

대한민국 1세대 커피명장 중 한 명인 안명규 커피명가 대표가 그리는 아프리카 케냐 커피농장의 5년 뒤 모습이다.

안 대표는 케냐산 원두와 청정 만년설 녹인 물로 커피를 만들어 볼 계획으로 지난해 킬리만자로를 찾았다. 그는 킬리만자로가 코앞에 바라보이는 케냐 초원에 커피나무 5000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그중 5분의 1은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심어야 했다.

안 대표는 척박했던 국내 원두커피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선구자다. 다방이 주류였던 1990년 대구의 경북대 후문 근처에 원두커피 전문점 커피명가를 열었다. 스타벅스 국내 진출 9년 전 이야기다. 이후 국내 처음으로 로스팅 기계를 도입했고, 바리스타 교육도 처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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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핀카의 실내 공간. 사진 이용성 차장

커피명가는 대구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40여 곳에 지점이 있다. 커피명가 외에 커피농장을 본뜬 복합 커피문화 체험공간 ‘라핀카(La Finca·스페인어로 ‘농장’이란 뜻)’도 운영 중이다.

안 대표는 매년 2~3개월씩 커피 투어를 떠난다. 올해로 15년째다. 주로 수확 시즌에 맞춰 주요 생산지와 소비지의 동향을 파악한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몇 년 전에는 세계 최고의 커피농장 중 하나로 꼽히는 과테말라 엘 인헤르토 농장의 국내 독점 공급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시작해 페루와 볼리비아, 남아공과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커피 투어를 앞둔 안 대표를 대구시 만촌동 라핀카에서 인터뷰했다.


케냐에 커피농장을 조성한 이유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투어를 다녀보면 멋진 커피농장 중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이 많다. 국내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농장에 투자하기보다 당장 수익을 내는 데 급급한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눈 덮인 킬로만자로가 바라보이는 한국 커피농장. 멋지지 않나? 커피 맛은 그다음 문제다.”

변변한 카페 하나 없던 시절에 어떻게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고교 시절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끓여준 원두커피를 맛본 것이 계기였다. 믹스커피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라 맛과 향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제대 후 원두커피 제조법을 처음 가르쳐주신 분도 선생님이셨다. 얼마 전에도 찾아뵈었다. 커피 대신 와인을 마셨지만.”

경주 출신인 안 대표는 계명대 신학과를 중퇴하고 1987년 군 복무를 마쳤다. 1990년대엔 두 달에 한 번 일본의 커피명인 가라사와 가쓰오를 찾아가 커피 제조법을 배웠다. 수입의 10%는 커피 관련 서적 구매에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워 지키고 있다.

30년 동안 커피를 다뤘다. 이제 원두만 봐도 커피 맛을 짐작할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다. 원두도 사람하고 똑같다. 사람을 잠깐 만나보면 70~80%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면의 20~30%가 사람됨의 중요한 판단 근거일 때가 많다. 원두도 커피를 만들어 맛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다 포기한 이유는 뭔가.
“신학을 선택한 건 고교 시절 숱한 방황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해 보니 내가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는 목회 활동을 돕는 게 낫겠다 싶었다. 커피를 업으로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익을 우선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커피농장에 놀이터 설립을 돕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커피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커피농장이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농장에 현금을 지원하면 농장주만 배를 불리는 경우가 생긴다. 요즘에는 농장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패러글라이딩을 배우러 다닌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자존감과 꿈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안 대표는 몇 년 전 5만달러(약 5300만원)를 들여 과테말라와 콜롬비아, 엘살바도르의 커피농장 세 곳에 놀이터를 지어 기부했다. 라핀카에서 개최하는 특강과 음악회 등 문화행사의 참가비 전액은 ‘행복한 커피’라는 이름으로 커피산지 아이들의 학교와 놀이터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된다.

커피농장의 아동 노동에 대한 우려도 크다.
“착취당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드물다. 우리 시각으로만 보면 안 된다. 현지 아이들에게 커피농장은 놀이터나 마찬가지다. 부모와 형제자매 모두 농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농장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없는 불우한 아이들에게는 커피 열매 따는 일이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라핀카 2층에 ‘묵언의 공간’을 운영하는 이유는.
“카페는 무엇보다 휴식과 사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에 치여 살아간다. ‘안 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안 듣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침묵의 공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페에서 마음대로 수다도 못 떨게 한다고 불평하는 손님도 있다(웃음).”

‘커피 도시’로 이름을 날렸던 대구가 요즘은 강릉에 밀리는 느낌이다.
“도시 규모가 큰 대구는 커피 말고도 알릴 것이 많다. 커피만 놓고 생각하면 관련 지자체의 접근법 차이가 있다. 대구에서는 커피 한 잔을 팔아 발생하는 매출에 집중하지만, 강릉은 커피를 관광자산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쪽의 경제 파급효과가 더 클지는 자명해 보인다.”


▒ 안명규
경주 문화고,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 회장, 라핀카 대표

이용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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