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족 기업 프로이덴베르크는 창업자 후손 320여명이 주식을 분산 소유하고 있다. / 프로이덴베르크
빈프리트 베버(Winfried Weber) 독일 비텐-헤어데케대 경제학 박사, 톰 피터스 그룹 컨설턴트, 독일 만하임대 실용경영조사연구소장

독일은 우리나라의 중소·중견기업을 뜻하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 강국이다. 미텔슈탄트는 독일 전체 기업의 99.6%를 차지하고 있으며, 360만개에 달하는 이들 기업이 독일 수출의 60~70%를 담당한다. 특히 독일 미텔슈탄트의 10%는 연간 매출액이 40억달러(약 4조3160억원) 이하이면서도 해당 분야 세계 시장 지배자인 ‘히든 챔피언’이다. 히든 챔피언 개념을 만든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에 따르면,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1300여개, 전 세계의 48%를 차지한다.

독일의 중견·중소기업 전문가 빈프리트 베버 독일 만하임대 교수는 “한때 휴대전화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였던 핀란드 대기업 노키아가 몰락한 이후 핀란드 전체 경제가 휘청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소수의 대기업에 의존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며 “독일은 미국·중국 등 경제 대국에 비해 대기업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경쟁력 있는 미텔슈탄트를 통해 경제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균형 잡힌 경제란 소수 독점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베버 교수는 독일 미텔슈탄트의 힘이 장기적 방향 설정을 통해 안정 성장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본다. 수백년간에 걸친 가업 승계를 통해 이들은 창업 초기의 기업 가치를 흔들림 없이 유지한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게 몸집을 불리는 것보다는 인재와 기술에 투자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독일 미텔슈탄트 성공모델 분석의 세계적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베버 교수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독일 미텔슈탄트의 경쟁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독일 미텔슈탄트는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품질 위주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향한다. ‘코끼리가 춤추는 곳에서 춤추지 말라’는 말이 있다. 중견기업은 대기업이 노는 곳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일 미텔슈탄트는 경쟁이 적은 틈새시장을 개척해왔다. 혁신과 연구·개발(R&D) 분야에도 아낌없이 투자한다. 당장 내일, 내년을 위해서가 아닌 10년 뒤를 위해서다. 이 덕분에 미텔슈탄트의 직원당 특허 수는 대기업에 비해 5배나 더 많다.
기업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직원에게 경영의 초점을 맞춘다는 점도 독일 미텔슈탄트의 특징이다.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가 있어야 장기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텔슈탄트의 관리자들은 앉아만 있지 않는다. 현장을 직접 돌며 직원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이를 통해 관리자와 직원 간 깊고 지속적인 개인적 관계가 형성된다. 성공적인 미텔슈탄트는 연간 이직률이 2~3%에 불과하다. 장기적인 고용 관계는 직원들의 높은 성과와 동기부여의 핵심이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족 경영도 미텔슈탄트의 특징이다.
“가족 경영은 미텔슈탄트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독일에는 4400여개의 가족 기업이 있고, 4대, 5대 후계자가 가업을 물려받는 일이 흔하다. 다만 가족 경영에서 주의할 점은 가족 서로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은 사이가 좋을 땐 든든한 내 편이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적 자원이지만, 한 번 분열되기 시작하면 이기주의가 발현돼 기업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 가족 기업은 잠재적인 갈등에 대비할 수 있는 규칙이 필요하다.”

어떤 규칙이 필요한가.
“1849년 설립돼 17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제조업체 프로이덴베르크는 8세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유지해 왔다. 프로이덴베르크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고객에게 제공한다’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 등의 책임 있고 윤리적인 경영 철학을 창립 이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프로이덴베르크는 비상장 가족 기업으로, 현재 창업자 후손 320여명이 주식을 골고루 분산 소유하고 있다. 보유 주식은 가족 구성원에게만 매각이나 이전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인당 최대 2% 이내로만 주식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식이 다수의 가족 구성원에게 조금씩 분산돼 있어 가족 간 갈등이 생기더라도 기업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국 중견기업은 가업 승계가 쉽지 않다. 상속세가 최대 50%에 달하는 등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균형 잡힌 경제를 위해서는 강력한 중견·중소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기업이 대기업보다 훨씬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내고, 수평적 조직 체계를 바탕으로 외부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견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은 이들이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조세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자녀가 승계한 후 일정기간(5년 이상) 이상 기업을 유지하고, 직원 고용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따라 사업용 자산과 주식에 대한 상속세를 85~100%까지 면제해준다. 이러한 제도가 없다면 기업들의 가족 승계가 어려워지고, 결국 단기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해질 것이다. 이는 경제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미텔슈탄트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사회가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급작스러운 변화에 충분히 준비되고 개방돼 있을 순 없다. 그러나 미텔슈탄트 중 일부 기업들은 디지털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 레이저 가공 기업 ‘트럼프’, 팬·모터 기업 ‘이비엠팝스트’, 드라이브 기술·장비 기업 ‘SEW유로드라이브’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정보기술(IT) 회사들이 알고리즘 기술 분야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그들이 디지털 혁명의 모든 시장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미텔슈탄트에 첨단 기술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 독일은 새로운 기술을 훈련시키고 기존 인력을 재교육할 것이다. 새로운 조직 모델도 필요하다. 지식의 반감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만큼,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혁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미텔슈탄트가 수평적인 조직 모델을 토대로 성장해 왔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도전하기에는 경직된 시스템의 대기업보다 중견기업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제조업의 디지털화를 통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인더스트리 4.0’을 2000년대 중반부터 추진해왔다. 그러나 최근 산업·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디지털화 정도와 속도가 뒤떨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미텔슈탄트의 디지털화를 돕기 위해 2016년부터 ‘미텔슈탄트 4.0’이라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미텔슈탄트의 디지털화 지원을 통해 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 중견기업이 성장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경영 환경만 놓고 보면 한국은 중견기업이 성장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소비자 집단을 보유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며 이를 빠르게 습득하는 전문 기술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대학 학위까지 갖춘 재능 있는 청년들이 수백만명에 이른다.
한국 청년들이 중견기업 입사를 꺼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년들은 중견기업에서의 경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일해야 성과가 나고,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다. 중견기업도 인재 유치에 더욱 투자해야 한다. 직원들을 국내 시장에만 머무르게 할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 내보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정부는 경제의 핵심 원칙과 가이드라인을 중견기업에 맞춰 재정립해야 한다. 모든 결정을 대기업에 유리하게 내리는 것은 중견기업의 성장을 통한 균형 잡힌 경제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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