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텔슈탄트는 독일 경제의 근간이다. 대표적인 미텔슈탄트인 가전 업체 밀레의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 블룸버그

“한국의 삼성이나 LG가 가전 시장에 공격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아요. 그들도 좋은 제품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만큼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제품을 만들기는 어려울 거예요.”

몇 년 전 독일 귀터스로의 밀레 본사에서 만난 라인하르트 친칸 밀레 회장이 한 말이다. ‘Immer bessrer(‘항상 더 나은’이라는 뜻의 독일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밀레는 세계 최고의 가전 업체 중 하나로 꼽힌다. 1899년 설립 이후 130여 년에 걸쳐 끊임없는 혁신으로 명품 가전 업체로 자리 잡았다. 친칸 회장은 회사 공동창업주 중 한 명의 4대손이다.

밀레는 친환경과 내구성을 앞세워 세탁기, 냉장고, 청소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매출액은 39억유로에 달한다. 특히 밀레의 디자인은 아이폰을 개발한 애플의 고(故) 스티브 잡스가 “영감을 얻었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밀레 본사 박물관에는 빨간색 밀레 브랜드를 단 사륜자동차가 전시돼 있다. 과거 밀레가 문어발 경영을 하던 시절의 유산이다. 창업 초기에만 해도 밀레는 가전제품에 주력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댔다. 카르스텐 프루던트 밀레 홍보이사는 “창업 초기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 자동차까지 생산했다”고 말했다.

문어발 경영을 하던 밀레는 가전 분야에 집중하고 연구·개발(R&D)에 투자를 늘리면서 히든 챔피언(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 분야의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우량 기업)으로 거듭났다. 밀레는 해마다 R&D에 매출액의 5%를 투자하고 있다. 밀레 직원 1만9000명 중에는 근속 연수가 40년에 가까운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과 마이스터(전문적인 기술·기능 인력)가 수두룩하다.

독일 경제를 밀레 같은 미텔슈탄트(Mittelstand)가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텔슈탄트는 19세기 귀족층과 저숙련 노동자 사이에 중간층을 형성했던 숙련공이 창업한 중소기업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금은 경영주나 그의 가족이 직접 기업을 이끄는 가족 기업을 뜻한다. 독일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소기업 대부분이 미텔슈탄트에 속한다. 독일 전체 기업의 99%인 360만 개 기업이 미텔슈탄트다. 미텔슈탄트는 독일 전체 수출의 70% 정도를 담당하고, 젊은층 직업 교육 기회의 80% 이상을 책임진다.

독일은 세계에서 히든 챔피언이 가장 많은 국가인데, 이 히든 챔피언의 대부분이 미텔슈탄트다. 히든 챔피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헤르만 지몬 지몬 쿠허 앤드 파트너스 회장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세계에 2734개 히든 챔피언이 있는데 이 중 48%인 1307개가 독일에 있다. 한국의 히든 챔피언은 23개에 불과하다. 독일은 어떻게 미텔슈탄트를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시킨 걸까.


젠하이저·파버카스텔도 미텔슈탄트

빈프리트 베버 독일 만하임대 교수 등 독일 기업 전문가들은 몇 가지 요인을 꼽는다. 우선 적극적인 해외 시장과 틈새 시장 개척이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미텔슈탄트의 성공 비결로 ‘극단적인 집중’을 꼽기도 했다. 대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전문성을 키운 것이 미텔슈탄트의 오늘을 가능하게 했다는 설명이다. 고급 오디오 시장에 집중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젠하이저(Sennheiser)나 문구류 회사인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기업은 대기업이 주목하지 않은 분야에서 성과를 낸 뒤 해외 시장까지 개척해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2016년 작고한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전 파버카스텔 회장은 “전통을 중시하는 경쟁력과 R&D, 글로벌 진출과 사회적 책임이 260년 동안 우리가 일류의 자리를 지켜온 비결”이라고 말했다.

지방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규모가 작은 미텔슈탄트는 혼자 힘으로 인력 양성과 기술 개발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연방정부가 모든 중소기업을 도울 수는 없기 때문에 지방정부나 지역상공회의소가 맞춤형 지원을 하는 게 중요하다. 지역별로 미텔슈탄트를 위한 융·복합 산업 클러스터를 운영한 것도 독일 산업 정책의 특징 중 하나다. 지역에 뿌리를 둔 은행이 그 지역 미텔슈탄트를 위해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맡는 것도 필요하다.

마지막 비결은 우량 기업에 대한 세제 감면과 정책 지원이다. 미텔슈탄트가 히든 챔피언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대에 걸쳐서 사업을 키워나가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데, 승계 과정에서 과도한 세금 부담이 생기면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 정부는 고용 수준을 유지하는 미텔슈탄트에는 상속세를 면제하는 등 적극적인 세제 감면 정책을 펼치고 있다. 현재는 상속 이후 7년간 고용 수준을 유지하면 상속세를 100% 면제해주고, 5년간 90%의 고용을 유지할 때는 85%의 상속세를 면제해준다.

다만 이런 세제 감면 정책을 한국이 무턱대고 따라하기는 쉽지 않다. 가업 승계에 대한 상속세 면제를 독일 국민이 인정하는 배경에는 투명경영과 노블리스 오블리주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독일 기업은 인사나 회계 같은 중요한 경영 과정을 노사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나아가서 경영주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문화가 있고,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갑질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plus point

늙어 가는 미텔슈탄트

‘독일 미텔슈탄트가 세대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 3월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독일 경제의 근간인 미텔슈탄트가 흔들리고 있다며 보도한 기사의 제목이다. FT가 인용한 독일 정책금융기관 KfW금융그룹의 자료에 따르면, 2년 내 은퇴 예정인 미텔슈탄트 경영자 23만6000명 중 후계자를 찾아 승계 협상을 마무리한 경우는 30%에 그쳤다. 28%는 후계자를 찾았지만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42%는 아직 후계자를 찾지 못했거나 아무런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원활한 가업 승계는 미텔슈탄트 경쟁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미텔슈탄트는 대를 이어 가면서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해 기업의 안정성을 높이고, 핵심 DNA를 보존하는 식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독일 출산율이 하락하고, 창업자의 자손들이 가업 승계를 거부하는 경우가 늘면서 미텔슈탄트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가업 승계가 늦어지면서 미텔슈탄트 경영진의 노쇠화가 빨라지고 있다. 2002년만 해도 미텔슈탄트 경영자 가운데 40세 이하의 비율이 28%에 달했는데 2016년에는 15%로 줄었다. 반면 50세 이상의 비율은 35%에서 60%로 뛰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독일 경제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KfW금융그룹에 따르면 가업 승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2022년까지 30만 개의 미텔슈탄트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 KfW금융그룹은 이렇게 되면 일자리 160만 개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종현 기자, 김택환 경기대 언론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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