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아는 매년 40억유로 이상을 R&D에 투자하며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 발빠르게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 뮌헨의 노키아 r&d 센터. <사진 : 노키아>

2015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긴급 회동이 열렸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올랑드가 미셸 콤버(Michel Combes) 알카텔루슨트 최고경영자(CEO)와 라지브 수리(Rajeev Suri) 노키아 CEO를 한자리에 모았다. 핀란드 기업인 노키아는 프랑스의 경쟁사인 알카텔루슨트 인수를 추진하고 있었다.

유일한 걸림돌은 프랑스 정부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외국 기업이 자국 기업을 인수하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이날 긴급 회동 직후 프랑스 정부는 두 회사의 합병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프랑스 내에서 일자리를 줄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노키아가 수용했다. 노키아는 프랑스 정부의 성명 직후 곧바로 156억유로(약 20조7000억원)에 알카텔루슨트를 흡수 합병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핀란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었다.



라지브 수리 노키아 CEO가 2015년 5월 주주총회에서 알카텔루슨트 인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에릭슨·화웨이와 3강 구도 형성

노키아의 알카텔루슨트 인수는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회사의 합병 전까지 세계 네트워크 장비 시장은 에릭슨과 화웨이의 2강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에릭슨의 점유율이 30.4%, 화웨이가 20.9%였다. 에릭슨은 점유율이 하락하는 추세였고 화웨이는 상승세였다.

노키아는 3위였지만 점유율이 14.5%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정체된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에릭슨과 화웨이의 경쟁 구도에서 노키아가 밀려나는 형세였다. 하지만 노키아가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노키아의 점유율은 2016년 기준으로 23.6%까지 올랐고, 에릭슨·화웨이와 함께 3강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단순히 점유율만 높아진 게 아니었다. 노키아는 무선 네트워크 장비에 강점이 있었고, 알카텔루슨트는 유선 네트워크 장비에 강점이 있었다. 5G(5세대 이동통신)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유선 네트워크 장비 분야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데, 알카텔루슨트 인수로 단숨에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민대홍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임연구원은 “노키아는 M&A를 통해서 네트워크 장비 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성장했다”며 “M&A로 경쟁사가 가지고 있던 유통 채널과 연구 인력, 브랜드 파워를 흡수했기 때문에 핵심 사업을 휴대전화에서 네트워크 장비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노키아는 핵심 사업에 매달리다 체질을 바꿀 타이밍을 놓친 기업들과는 달랐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노키아의 주력 사업은 휴대전화였다. 2007년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에서 노키아의 점유율은 41%에 달했다. 불과 6년 뒤에 노키아가 휴대전화 사업부를 매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5년 동안 휴대전화 시장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노키아는 한순간에 몰락했다. 노키아는 2013년 휴대전화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모두가 노키아의 몰락에 충격을 받고 있을 때, 노키아는 재기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핵심 전략은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의 변신이었다. 노키아는 2007년 지멘스와 함께 조인트 벤처인 ‘노키아지멘스네트워크(NSN)’를 설립했다. NSN은 노키아 부활의 발판이 됐다. 노키아는 2011년 모토롤라의 네트워크 사업부를 인수하는 등 적극적인 M&A로 이미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2014년 NSN 대표를 맡고 있던 라지브 수리가 CEO로 발탁되면서 노키아는 본격적으로 네트워크 장비 사업을 강화하게 된다. 노키아는 NSN의 지멘스 지분 50%를 추가 인수해 ‘노키아솔루션즈네트워크(NSN)’로 이름을 바꿨다. 이듬해 알카텔루슨트 인수는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의 변신에 화룡점정이었다.

노키아는 M&A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채우고 강점을 더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노키아는 2016년에 미국 스타트업 ‘게인스피드(Gainspeed)’와 프랑스 의료기술 전문기업 ‘위딩스(Withings)’, 캐나다 소프트웨어 기업 ‘나키나(Nakina)’를 인수했다. 게인스피드는 케이블 네트워크 용량을 향상하는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고, 나키나는 네트워크 보안 전문 기업이다. 2017년에도 노키아는 IP 네트워크 관리 및 보안용 애널리틱스 기술을 가지고 있는 미국 기업 ‘딥필드(Deepfield)’와 핀란드의 통신 소프트웨어 기업인 ‘컨텔(Comptel)’을 인수했다. 동시에 노키아는 지도사업부인 ‘히어(Here)’를 아우디-BMW-벤츠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등 네트워크 장비 사업에 확실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키아의 변신은 실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노키아의 네트워크 부문 매출액은 112억유로였는데, 알카텔루슨트를 흡수 합병한 이후인 2016년에는 218억3000만유로로 늘었다. 2년 만에 네트워크 매출액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에는 네트워크 부문 매출액이 205억2000만유로로 전년대비 소폭 감소했지만, 노키아는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네트워크 부문 매출액 감소는 노키아의 경쟁력이 하락해서가 아니라 4G 네트워크 장비 수요 자체가 줄어든 탓이라는 설명이다. 노키아는 2020년 즈음 5G 네트워크 장비 수요가 급증하면 자연스럽게 네트워크 장비 매출도 다시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리 CEO는 “2019년과 2020년에 5G가 상용화되면 관련 장비 시장도 크게 좋아질 것”이라며 “노키아는 5G 네트워크 장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앞서 있다”고 말했다.


노벨상 14명 배출한 벨 연구소도 인수

노키아가 인수한 알카텔루슨트는 ‘벨 연구소(Bell Labs)’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벨 연구소는 세계 최초로 전화교환기를 개발한 곳으로 통신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1925년 설립 이후 벨 연구소에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만 14명에 달할 정도다. 벨 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활성 특허만 해도 3만3000건에 이른다. 전 세계 연구센터에 흩어져 있는 벨 연구소 R&D 인력을 모두 합하면 4만여 명 수준이다.

노키아는 벨 연구소를 확보하면서 통신 분야 R&D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이런 R&D 역량이 고스란히 노키아의 네트워크 장비 사업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키아 관계자는 “벨 연구소는 IP라우터와 유선통신 장비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며 “벨 연구소를 흡수하면서 5G와 사물인터넷(IoT)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게 더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노키아는 네트워크 장비 회사로 변신하면서 기술 투자를 늘리고 있다. 노키아는 매년 R&D에 40억유로가 넘는 돈을 투자하고 있다. 특히 네트워크 장비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성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민대홍 ETRI 선임연구원은 “2016년 기준으로 노키아의 네트워크 장비 분야 R&D 투자액이 33억유로(약 4조4000억원)에 달했다”며 “M&A뿐만 아니라 노키아의 자체적인 R&D 투자도 네트워크 장비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특허도 노키아의 강점 중 하나다. 노키아는 2013년 휴대전화 사업부를 MS에 매각할 때 네트워크 장비와 관련된 특허는 철저하게 보호했다. 특허가 중요한 자산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노키아는 매년 특허로만 10억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노키아는 전 세계에서 표준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기업이기도 하다. 특허청에 따르면 노키아가 보유한 표준특허는 6482건으로 퀄컴(6301건)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표준특허는 해당 기술을 이용하지 않으면 관련 제품을 생산하기 어려운 특허를 말한다. 표준특허가 많으면 특허료 수익도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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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네트워크 장비, 글로벌 기업이 장악


삼성전자는 5세대 이동통신 시대를 맞아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한국은 이동통신 강국이지만 통신망 구축에 들어가는 네트워크 장비 시장은 글로벌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2세대 이동통신(2G)까지만 해도 네트워크 장비 내수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이 90%에 달했지만, 4G에서는 40% 밑으로 떨어졌다.

과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를 중심으로 이동통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CDMA 기술 개발과 상용화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내 기업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3G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럽이 주도한 GSM(시분할다중접속)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4G(LTE) 역시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에릭슨이나 노키아 같은 글로벌 기업에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박종계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 산업진흥본부장은 “네트워크 장비는 한 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유지·보수까지 계속 같은 업체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후발주자가 성장하기 쉽지 않다”며 “글로벌 기업이 시장을 선점하면서 국내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그나마 규모가 있는 삼성전자도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3.5%에 불과하다. 삼성전자는 5G로의 전환기를 기회 삼아 네트워크 장비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B2B(기업 대 기업) 사업의 특성상 한 번 활로를 뚫으면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지만, 경쟁 우위를 누리는 글로벌 기업을 추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국내 중소기업들도 공공시장을 중심으로 이동통신 중계기 등 일부 네트워크 장비를 만들고 있지만, 코어라우터나 광전송장비(WDM) 등 고부가가치 장비는 대부분 글로벌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 본부장은 “공공시장에서도 글로벌 기업의 점유율이 70%에 달한다”며 “통신망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적인 인프라이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의 점유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의 네트워크 장비 업체인 화웨이와 ZTE의 시장 진입을 막고 있다. 공화당의 톰 코튼과 마크 루비오 상원의원은 2월 7일 미국 정부가 화웨이, ZTE의 네트워크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민대홍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임연구원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네트워크는 정보와 데이터를 전달하는 동맥 같은 역할”이라며 “사이버 영토의 자주권 확보와도 연결되는 문제인 만큼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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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접고 소프트웨어 집중하는 블랙베리

이종현 기자


존 첸(가운데) 블랙베리 CEO와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2016년 12월 자율주행차 혁신센터 설립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지난해 9월 실리콘밸리의 대로변에 있는 광고판에 ‘블랙베리(BlackBerry)’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블랙베리 스마트폰은 없었다. 대신 날렵한 외관의 스포츠카가 광고판을 채우고 있었다. 스포츠카 옆에는 ‘당신의 차를 블랙베리가 지키고 있습니까?(Is Your Car BlackBerry Secure?)’라는 광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스마트폰 시절부터 블랙베리의 강점이었던 ‘보안’을 살리면서도 ‘자동차’라는 새로운 먹을거리까지 소개하는 일석이조의 문구였다.

2000년대 중반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한 블랙베리는 독특한 디자인과 철저한 보안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한때 스마트폰 시장에서 점유율이 20%에 달할 정도로 각광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애플과 삼성전자, 중국 회사들로 스마트폰 시장이 재편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가트너에 따르면 2016년 말에 블랙베리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0%였다.

결국 블랙베리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철수하는 선택을 했다. 블랙베리의 존 첸(John Chen) 최고경영자(CEO)는 2016년 9월 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하드웨어 개발을 모두 중단하고, 앞으로는 보안과 애플리케이션 등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랙베리는 그해 12월 중국의 스마트폰 제조사인 TCL에 블랙베리 상표권을 넘기면서 스마트폰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대신 블랙베리는 QNX에 집중하기로 했다. QNX는 블랙베리가 2010년 하만으로부터 인수한 업체다.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만드는데, 전 세계 6000만 대 이상의 차량이 QNX의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존 첸 CEO는 TCL에 블랙베리 상표권을 넘기겠다고 발표한 지 나흘 만에 QNX 사옥에서 자율주행차 혁신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차량용 소프트웨어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블랙베리의 실적을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년 새 주가 두 배 올라

블랙베리의 매출액은 2011년에만 해도 200억달러(약 21조60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사업이 부진을 겪으면서 2016년에는 21억달러로 떨어졌다. 불과 5년 만에 매출액이 10분의 1로 준 것이다. QNX를 바탕으로 체질 개선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실적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블랙베리의 지난해 매출액은 13억달러였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블랙베리의 부활을 점치고 있다. 2016년 12월 30일에 6.89달러였던 블랙베리 주가는 2월 21일에는 12.2달러까지 올랐다. 매출이 떨어지는 와중에 주가는 두 배로 뛴 것이다. 토드 쿠플랜드(Todd Coupland) CIBC 월드마켓 기술 애널리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낼수록 블랙베리의 가치도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QNX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주목받는 건 보안 성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블랙베리는 스마트폰 사업이 주춤하자 2014년 이후 보안 관련 소프트웨어 업체들을 대거 인수하며 기술력을 키웠다. 2015년에는 대표적인 모바일 보안 소프트웨어 업체인 굿테크놀로지를 4억2500만달러에 인수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블랙베리는 QNX의 플랫폼이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가운데 유일하게 ‘ASIL-D’ 인증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동차 기능 안전성 국제표준인 ISO 26262 가운데 차량안전등급(ASIL)은 A부터 D등급까지 있는데, D등급이 가장 안전성이 뛰어나다.

블랙베리는 최근 QNX의 엔지니어를 지금의 두 배인 1000여 명으로 늘리고, 7600만달러를 투자해 캐나다 오타와 근처에 자율주행차를 위한 기술센터를 추가로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앱티브(Aptiv)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과의 협력도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글렌 드 보스(Glen De Vos) 앱티브 최고기술책임자(CTO)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QNX의 뛰어난 보안 성능이 블랙베리와의 제휴를 결정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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